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최민혜(석천초등학교 교사) 


여러분, 매년 11월 20일이 무슨 날인지 아나요? 바로 1954년에 선포된 세계 어린이 날(Universal Children’s Day)이랍니다. 이후 1959년 11월 20일, 유엔 총회는 아동의 특별한 권리를 정한 ‘아동권리선언’을 채택했어요. 1948년 12월 10일에 유엔총회가 세 계인권선언을 채택한 지 11년이 지나서 아동권리선언이 채택된 것이죠. 그리고 30년이 지나서, 1989년 11월 20일 유엔은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채택했어요. 

유엔아동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CRC)은 국제사회가 이 세상 모든 아이를 위해, 그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 증진, 실현하기 위해 만든 약속이죠.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우리나라도 비준(조약을 헌법상의 조약 체결권자가 최종적으로 확인·동의하는 절차)한 국제법이며, 우리 헌법 제6조에서는 헌법에 따라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어요. 이렇게 어 린이와 어린이의 권리도 국제적으로 인정하고 보호하기 시작했어요. 

누군가를 소개한다고 하고는 왜 이렇게 어린이날과 아동 권리에 관해 설명하는 걸까 요? 그건, 소개할 선생님이 이런 일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분은 직접 많은 아 이를 돌보면서 아이들의 권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에요. 이분은 ‘야누시 코르 차크(Janusz Korczak)’ 선생님이에요. 


내가 아는 코르차크 선생님은 아름다운 색들이 더해진 무지개와도 같은 분이세요. 빨주노초파남보, 하나하나의 색도 예쁘지만, 함께 있어서 마치 하늘 위에 놓인 아름다 운 다리와 같은 무지개요. 코르차크 선생님을 설명하자면,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 주며 치료하는 유능한 소아과 의사 선생님,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소설이나 교육에 관한 책 을 쓰신 멋진 작가 선생님, 거리의 아이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의사 생활을 그만두고 보육원을 운영하신 보육원 원장선생님, 두 번의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애국심 가 득한 군인, 전국 아이들의 편지에 답장하고, 라디오를 통해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로했던 상담가, 보육원에서 어린이 법정과 어린이 의회를 운영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가지고 지도하는 교육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미 유명한 분이셔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 도 보육원 아이들 200명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기차에 오른 고아들의 아버지. 이 모든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그 마음은 따뜻하고 활약이 대단하신 분이세요. 어떤 분인지 더 궁금해지나요? 그럼 조금 더 여러분이 코르차크 선생님을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줄게요. 


코르차크 선생님은 1878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셨 어요. 폴란드에서 태어나시긴 했지만 유대인이었고, 할아버지 나 아버지처럼 코르차크 선생님도 유대인들과 폴란드인들 의 다리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셨어요. 본래 이름은 헨 리크 골트슈미트, 할아버지는 의사, 아버지는 변호사 였던 그분의 가정은 부유했죠. 어머니께서는 선생님 에게 길거리의 아이들과 놀지 않도록 하셨지만, 선생님은 창문 너머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늘 마음을 주곤 하셨어요. 그러다가 선생 님이 18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갑 자기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그래 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가족들의 생계 를 책임지셨죠. 20세에 의학 공부를 시 작하고, 문학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을 받 았어요. 이때 야누시 코르차크라는 필 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셨죠. 1905년 러 일전쟁 때에는 러시아 군대에서 군의 관을 지내셨어요. 전쟁을 마치고 돌 아와서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유대 인 소년들과 3주간의 여름 캠프에 참가하며 거친 ‘아이들’에 대해 놀라면서도 빠져 드셨던 것 같아요. “나는 천문학자가 별에 입 맞추 듯이 아이들에게 입을 맞춘다.”에서 그런 선생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담 은 책을 계속 쓰셨어요. 그리고 고아구호회를 위한 모금행사에 참여한 일을 계기로 고아들에 대해, 그리고 보육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어요. 마침내 1912년 코르차크 선생님의 첫 보육원 ‘고아들의 집’이 개원하죠. 선생님은 아이들이 잘 보이는 곳에 원장 실을 배치하는 등 보육원 설계부터 직접 참여하셨어요. 침대가 106개였다고 하니 인원을 대충 알 수 있겠죠? 그리고 겨우 몇 년 후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다시 러시아 군대로 참전하셨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전쟁 중에도 글을 쓰고 원고 뭉치를 들고 다니셨다는 거예요. 이 원고는 국내에서 ‘어떻게 어린이를 사랑해야 하는가’로 번 역되었고, 코르차크 선생님이 생각하는 교육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후에 돌아와서는 1919년 두 번째 보육원 ‘우리들의 집’을 같이 운영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계속 글을 쓰고, 보육원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름에는 여름 캠프를 떠나는 무척이나 바쁜,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라서 행복한 선생님의 시간이 이어졌어요. 또 그 때 당시로서는 처음이다시피 한 어린이 신문 ‘작은 평론’을 발간했어요. 아이들은 전국 에서 편지를 보냈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빠의 이야기, 부모에게 뺨을 맞았다는 이야 기…. 아이들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읽히기 좋다는 소문이 나서 어른들에게도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대요. 그리고 코르차크 선생님은 1928년 ‘아이들의 존중받을 권리’ 책을 내 기도 하셨어요. 이 책을 쓰기 전부터도 아이들의 권리를 계속 강조하긴 하셨지만, 이 책 에서는 아이들이 실수하면서 성장할 권리, 미래를 위해서가 아닌 오늘을 살 권리, 그리 고 자기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권리에 관해 쓰셨어요. “자작나무는 자작나무로, 참나무 는 참나무로, 엉겅퀴는 엉겅퀴로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아이들 각자의 고유 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시는 선생님의 마음은 지금도 깊은 울림을 주며 전해집니다. 그리 고 ‘노(老) 의사의 라디오 정담’이라는 라디오 방송도 하시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 다고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받던 선생님과 조국 폴란드에 암 흑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어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던 것이 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어요. 그리고 1940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 내에 유대인을 구별하여 살게 하는 높은 장벽의 게토가 세워졌어요. 유대인이었던 코르차크 선생님과 보육원 아이들은 그곳으로 옮겨갔고, 전쟁 중에도 아이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과 돈을 구하기 위 해 선생님은 매일 자루를 어깨에 메고는 여기저기 찾아다니셨어요. 선생님이 너무나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구걸하러 와서 사람들은 피하기도 했대요. 그리고 선생님은 감자가 든 보육원의 수레를 독일군에게 빼앗기자 항의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셨 어요. 그렇게 전쟁의 죽음과 가난, 굶주림 속에서 더욱 많아진 길거리의 고아들을 보면 데려와서 함께 돌보셨어요. 코르차크 선생님은 당시 이미 유명한 분이셔서 게토를 떠나 안전히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밤에 아픈 아이 곁을 떠나지 않는다”라면서 아이들 곁에 남으셨어요.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가 지나고, 1942년 8월 6일, 독일 군은 게토에 있던 사람들을 동부로 가는 기차에 태웠어요. 선생님과 200명의 아이들도 그 기차에 올라타야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어요. 


코르차크 선생님의 삶은 여기서 끝났지만, 그분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주시던 삶을 아직도 추억하고 감사하는 모임들이 있어요. 그리고 특히 1978년 폴란드는 코르 차크 선생님의 사상에 기초하여 ‘아동권리협약’을 위한 초안을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 했어요. 그래서 코르차크 선생님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1978년은 ‘야누시 코르차크 의 해’로 이름 붙여지기도 했어요. 이렇게 코르차크 선생님의 삶은 영화처럼 감동을 주 기에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 <코르작(Korczak)(1990)>으로도 제작되었고, 반짝이 는 별의 이름 ‘2163 Korczak(1971)’에도 선생님의 이름이 있답니다. 


오늘 이 글을 통해 코르차크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친구들도 있을 것 같아요. 더 궁 금한 친구들은 관련된 영상이나 글, 책도 많이 있으니 찾아보세요. 코르차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때에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대하셨어요. 전쟁도 그 사랑과 신념을 빼앗지 못했죠. 그래서 돌아가신 지 81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분 의 생각과 실천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국제적인 협회도 있고, 선생님처럼 그분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나요? 친구 관계, 학업 성적, 진로 등 각자 다른 고민이 있겠죠. 오늘 소개한 코르차크 선생님 의 삶을 통해, 여러분 각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 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요. 생각은 여러분의 힘이 되고, 판단을 해야 할 때 기준이 되어 줄 거예요. 오늘 여러분이 코르차크 선생님에 대해 읽으면서 살아갈 이유와 방법을 생 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